산문(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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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서점
어릴 적 전주에 살았는데 엄마 손을 잡고 서점에 갔다. 1990년대 초반 전주에는 홍지서림이 있었다. 당시에는 홍지서림이 전주 지역을 대표할만한 대형서점이었다. 엄마랑 서점에 가서 책을 읽었는데 주로 '으악 귀신이다', '공포특급' 같은 공포-미스터리류의 책을 좋아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책보다 노래 가사에 집중했던 것 같다. 시스템 다이어리에 발라드 가수들의 노래 가사를 적었다. 그 나이대 친구들도 나처럼 감수성이 풍부했는지 가사집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친구가 많았다. 그렇게 몇몇 친구들끼리 가사를 돌려 보며 낭만적으로 살았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당시에는 한국문학 보다 영미문학을 읽었다. 영문을 읽으면 왠지 더 있어 보이고 멋져 보이는 게 있었다. 그 때 역시 문과 졸업 후 취업 상황이..
2023.07.06 -
인천국제공항
비행기를 타러 가는 게 아니었다. 인천공항을 목적지로 여행하는 사람들에 관한 뉴스를 봤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비행기날개를 묶기 수년 전의 기사였다. 사람들이 뜨거운 여름을 피해 공항으로 피서를 떠난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그들이 공항으로 여행을 떠나는 진짜 이유를. 일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했는데 당분간 해외를 나갈 길이 사라졌다. 공항이 보고 싶어졌다. 김포공항 말고 인천국제공항에 가야지 계획했다. 어렵게 일정을 짜거나 할 필요가 없었다. 다음 날이 되면 지하철에 몸을 싣고 인천공항 제2터미널역에서 내리면 되니까. 일몰이 시작될 무렵인 4시가 조금 넘어 출발했다. 공항 안으로 쏟아지는 노을빛을 만나길 기대하면서. 시집을 한 권 챙겼다. 지하철에서 왕복 두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무료할까봐 책을 ..
2020.10.22 -
강릉으로 혼자
내일 아침이 되면 집 밖을 나설 거야 버스정류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에 갈 거야 서울역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삼천 원짜리 호두과자를 사고 한 개만 먹을 거야 편의점에서 커피 우유를 사고 승차 게이트 안쪽으로 들어갈 거야 마스크를 낀 아주머니에게 참치 꼬마김밥을 달라고 할 거야 아침 식사를 비닐봉지에 넣은 채로 자박자박 걸어갈 거야 기차 안에 앉으면 창가 자리에 앉아 찰칵 사진 찍을 거야 사진이 잘 찍혔는지 보고 마음에 들면 너한테 보내줄 거야 새로 산 중고 책을 왼손에 펼쳐 들고 창밖 풍경과 종이를 번갈아 바라볼 거야 유리창 너머 산과 들판을 보며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을 더듬을 거야 강릉역에 도착하면 우와 강릉이다 속으로 소리치며 피식 웃을 거야 흐릿한 하늘이 나를 안목해변까지 걷도록 안내할 거야..
2020.10.18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염탐기
부모님께 서울로 올라오라며 늘 이야기하는 곳이 미술관이다. 서울에는 그 어느 도시보다 풍성한 미술관이 있다. 전시도 그러하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문을 닫은 줄 알은 미술관들이 여전히 운영되고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모두 예약하고 관람할 수 있다. 오늘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갔다. 경복궁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걸어가는데 집회가 있는지 경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통제하는 경찰을 보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어느 커플의 대화가 그 상황을 잘 이야기해준다. "무슨 전쟁난 것 같아. 왜 이래?". 화창한 날씨 때문이었을까? 미술관 근처는 활기로 가득했다. 커플, 가족, 친구끼리 삼삼오오 모여 걷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이었다. 2시 관람을 예약했는데 조금 일찍 도착했다. 매..
2020.10.09 -
이병률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서평
이토록 아름다운 시인이었을 줄이야! 대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중령님이 산다. 중령님의 추천으로 어느 군부대에 온라인홍보 자문을 하러 갔다. 자문을 마치고 중령님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이병률 작가 이야기가 나왔다. 이병률 산문집 '끌림'을 읽고 있는데 별로 끌리지 않더라고 이야기했다. 중령님은 "40대가 되면 공감이 갈 거예요"라고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40대가 된 지금 다시 읽은 이병률의 글은 가슴으로 읽혔다. 어쩜 그리 좋은지. 난 이병률의 시가 어려운 어휘를 사용하지 않아서 좋다. 쓰이지도 않는 어휘를 나열한 채로 그럴싸해 보이려 작정한 시들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활용해 절절한 시를 엮어낼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는가. 이 시대에 그런 시인이 있기는 한가? 폼 잡지 않..
2020.10.05 -
조지 오웰 <난 왜 글을 쓰는가>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 1984로 유명한 세계적인 소설가의 이름이다. 나는 을 몇 장 읽다 말았다. 난 조지 오웰의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재밌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펭귄북스에서 나온 조지오웰 에세이 원서가 있다. 주황색 책인데 책의 디자인과 재질도 고전적이면서 예쁘게 잘 나왔다. 관심이 있으면 서점에 들러보길. 책에서 솔직하고 통찰력이 돋보이는 문장을 발견했다.1946년에 쓴 Why I Write(난 왜 글을 쓰는가)라는 제목의 산문이며 다음과 같은 문장이 담겨 있다. "Writing a book is a horrible, exhausting struggle, like a long bout of some painful illness. One would never undertake such a thing..
2020.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