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에서 색채심리학과 마주친 칸딘스키 전시 감상평

2020. 10. 3. 19:02라이프/이것저것 리뷰

전시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좋아하는 미술관은 코로나 사태로 문을 닫았다. 전시를 매번 책이나 인터넷으로 감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이버에서 유료 전시를 찾았다. 매 시간 다른 도슨트가 나와 약 1시간 반 동안 화가와 그의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는 구성의 전시가 보였다. 토요일 오전이면 어떠하리. 연남동에서 만난 칸딘스키는 '색'다르게 다가왔다.

 

러시아 태생의 칸딘스키는 몽골의 피가 섞여 있으며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차를 공급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악기를 접하게 된다. 피아노와 첼로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인 칸딘스키는 학업성적도 남달랐다. 한국의 서울대처럼 최고의 두뇌들이 수학하는 대학에서 공부했다. 경제학, 법학에서 두루 뛰어난 실력을 보였으며 20대의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직을 제안받는다.

 

그러나 엘리트에 대한 사회적 시선 따위는 그의 창작 욕구를 막지 못했다. 30대부터 유명 화가(장애우) 밑에서 그림을 배운 칸딘스키는 예술의 세계에 투신한다. 칸딘스키는 마르크와 함께 청기사를 결성한다. 마르크가 전쟁에 나가 낙마하는 사고로 목숨을 잃자 3년 만에 청기사는 해체되고 만다.

 

임재이 도슨트

 

나쁜 남자 칸딘스키, 나쁜 스키

칸딘스키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나쁜스키'다. 그에게는 가브리엘 뮌터라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수년간 사귀던 여자친구는 아기를 갖고 싶어 했으나 그는 무시하는 자세로 일관한다. 나중에는 여친 가브리엘 뮌터를 홀로 남겨두고 다른 곳으로 떠난다. 남겨진 가브리엘 뮌터는 남친 칸딘스키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40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을 받아보지 못했다. 딱 한 번! 칸딘스키는 1통의 답장을 보내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 여기서 다른 여자 만났어. 내가 그린 그림들 돌려줄래?". 칸딘스키는 20살이 넘는 연하와 바람이 났다. "나 다른 여자 생겼어" 이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렵더냐!

 

몇십 년의 밤을 그리움으로 지새운 전 여친 가브리엘 뮌터는 어느덧 할머니가 됐다. 전시해설을 담당한 도슨트님은 그녀가 칸딘스키 덕에 유명화가가 됐다고 했으나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차라리 욕을 먹더라도 편지로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몇 달도 아니고 수십 년을 한 남자만 바라본 여자가 몹시 가여웠다. 그녀는 칸딘스키가 미웠는지 그의 그림 대신 다 쓰고 버릴 법한 물건들만 보냈다고 한다.

 

칸딘스키의 집요한 성격이 드러나는 일화가 또 있었다. 그는 전 여자친구 가브리엘 뮌터가 본인의 작품을 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녀를 경찰에 고소했다. 유독 여자 문제에 관해서 칸딘스키에게 분노하는 이유는 가브리엘 뮌터의 얼굴이 너무 착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심성이 곱게 생겼다. 내가 일전에 사귀었던 여친과 똑 닮았다. 나는 전 여친과 헤어질 때 마음이 식어서 그렇다고 얘기했다. 그래야 그녀도 다른 사람을 만나 달곰한 연애를 할 것 아니겠는가.

 

칸딘스키 작품에 대한 설명도 인상적이다. 그는 좋은 머리로 그림을 그리는 단계를 넘어 성문화했다. 마치 교과서를 만드는 것처럼 참고서를 만들었다. 칸딘스키는 미술에서의 점, 선, 면을 이론화하였고 <점선면>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렇게 칸딘스키는 추상미술의 아버지가 됐다. 롯데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등 유통 재벌이 운영하는 백화점 벽면에 유난히 칸딘스키의 그림이 자주 등장한다고 했다.

 

칸딘스키 전시 중간에 도슨트의 안내로 그림의 주제를 맞추는 시간을 가졌다. 관객 중 한 분이 전쟁이라는 키워드를 맞추기는 했으나 나머지를 맞추는 데는 실패했다. 칸딘스키의 작품은 그만큼 어렵고 난해했다. 칸딘스키가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런 걸까? 그의 그림에서는 예술작품 특유의 절망, 고뇌가 엿보이지 않았다.

 

솔직하게 평을 내리자면

칸딘스키라는 화가를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마치 그의 자서전을 읽은 것처럼, 칸딘스키에 대한 영화를 본 것 같아 좋았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거의 모든 집단활동이 차단된 현실 속에서 잠시나마 화가의 입장이 돼 개인의 예술관 혹은 세계관을 확장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전시해설가의 말 중에 기억하고 싶은 내용은 에버노트로 기록했다.

 

훈훈하고 편안한 전시해설가의 입담도 좋았다. 덕분에 감성 배터리를 100%까지 충전했다.

 

내 가슴에 바실리 칸딘스키를 데려다준 임재이 도슨트에게 뜨거운 포옹을.

(남자라서 죄송...)

 

2020년 10월 3일 오전 11시 전시를 보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