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를 닮은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동그란 안경을 쓴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그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 쓰는 재능과 능력이 그 누구보다 탁월하다. 독특한 외모와 입담, 할 말을 다 하는 듯한 그에게 어찌보면 호불호가 갈리는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모난 돌은 기필코 정에 맞아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사회는 '할 말, 안 할 말을 가려야 하는 사회'다. 김정운은 문화심리학자, 교수, 칼럼니스트라는 직함보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노는만큼 성공한다'는 책의 저자로 기억되고 있다.
어렵고 무거운 주제를 쉽고 재미있게 써내리는 능력
김정운의 글은 조선일보에 연재중인 칼럼으로 처음 접했다. 나는 그의 책을 한 번도 읽지 않았다. 제목이 강렬하긴 했지만 공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정운의 감언이설(敢言異說)이라니,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우리가 알고있는 감언이설과 소리는 같지만 뜻은 다르다. 네이버 한자사전을 찾아보니 감히 다른 말을 한다는 의미였다. 보통 감언이설은 달달한 말로 남을 꾀한다는, 조금은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는데 내 생각에는 두 가지 의미를 한 단어에 모두 담으려는 김정운 교수만의 기교인 것으로 보였다.
김정운의 재밌는 글솜씨에, 송곳처럼 날카로운 통찰력에 매번 탄복한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재미와 행복에 관한 담론이 없었던 기성세대에게, 그의 글은 마치 가뭄으로 말라버린 땅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단비와도 같다. 무겁고 어둡기만한 한국 사회의 문제를 유쾌한 비유와 직설로 재미있게, 술술 읽히는 글로 풀어주는 감언이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추천한다. 어려운 주제를 쉽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는 능력은 김정운만의 장기다.
강연방송에도 출연 '글도 잘쓰고 말도 잘해'
"글을 잘 쓰면 말을 못하고, 말을 잘하면 글을 못 쓴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둘 다 잘하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 그런데 그는 SBS 아이러브인(http://www.youtube.com/watch?v=GyS3Hc6juKg), EBS 하이힐(http://www.youtube.com/watch?v=IFR11ibd7TA)에 출연해 솔직하고 재치있는 입담으로 청중을 사로잡는다. 말도 정말 잘한다. 강연이 쉽고 재밌지만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가 명확하고 그 내용 또한 유익하다. 밉지 않은 잘난척도 매력적이다.
SBS 아이러브인 2회 방송(김정운, 사는 게 재미없는 이 시대 남자들에게)에 출연한 그는 한국인들은 왜 불행하고,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강연 도중 소개하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다니엘 카네만의 말은 이 방송을 한마디로 정의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내 하루의 삶속에서 기분좋은 시간이 길면 길수록 행복한 사람이다!"
김정운의 감언이설 추천 칼럼 5
5) 더 자도 된다 朝刊은 좀 더 있어야 온다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2/12/2013121204274.html
남자는 개 아니면 애다 (한겨레 칼럼 '김정운의 남자에게' 중)
남편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여동생에게 던진 내 친구 태원의 ‘배째라’식 충고다. 남자는 잘 달래야 한다는 이야기다. 듣는 순간 ‘허걱’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여운이 남는다. 남자는 웬만해선 성숙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이야기다. 인정하기 싫지만 옳다.
클래식한 정신분석학자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그들에겐 오히려 여자가 더 성숙하기 어려운 존재다. 성숙의 척도가 되는 초자아, 즉 ‘슈퍼에고’(superego)를 내면화하는 정신분석학적 기제가 여자에겐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슈퍼에고의 사회적 가치, 도덕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경쟁하게 되는 아들은 ‘거세불안’(castrating anxiety)이라는 근원적 공포에 시달린다. 아들은 아버지를 들이받든가, 아니면 착하게 아버지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성숙해간다. 여자아이들에게는 바로 이 성숙의 계기가 결핍되어 있다. 거세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히 성숙할 수 없는 여자에 관한 이런 식의 이론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따라가자면 어쩔 수 없이 다다르는 황당한 결말이다. 프로이트가 살았던 19세기 말 시대정신의 한계다.
요즘은 반대다. 최근의 심리학 이론들을 적용해보면 남자들의 성숙이 훨씬 더 어렵다. 아이들이 발달과정에서 내면화하는 도덕적 규범들의 초기 형태는 ‘사회적 참조’(social referencing)라는 현상으로 설명된다. 낯선 상황, 혹은 낯선 대상에 대한 아이들의 규범적 판단은 어머니의 정서적 반응을 참조하여 결정된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난생처음 흑인을 본 아이는 일단 어머니의 표정을 살핀다. 어머니가 당황해하거나 어색해하면 아이의 반응도 똑같아진다. 불안해하며 울거나 어머니에게 안긴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면 아이의 반응도 지극히 편안해진다. 흑인에 대한 문화적 편견은 이렇게 주변인들의 정서적 반응을 참조하는 과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등과 같은 사회적 소수집단에 대한 편견 또한 이런 식으로 세대를 건너며 전달된다. 물론 왜곡과 편견의 해소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가능하다.
‘사회적 참조’는 사회의 규범과 가치들을 매개하여 성숙을 가능케 하는 문화학습이다. 문제는 이 사회적 참조에 엄청난 남녀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자아이들의 사회적 참조는 문화적으로 장려된다. 남자아이들에 비해 정서적 표현이 훨씬 자연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면 남자아이들의 정서적 표현은 문화적으로 억압된다. 남자아이들이 울면 부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다. “울지 마! 사내놈이 왜 울어!” 좋아서 막 날뛰면 또 그런다. “사내놈이 뭐 그렇게 가볍게 까불대니!” 도대체 우는 것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 ‘사내놈’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은 아예 법적으로(?) 못 울게 되어 있다. 고속도로 화장실에 가면 남자 소변기 위에 한결같이 이런 문구가 걸려 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오줌이 콱 막힌다. 죽으란 이야기다. (여자화장실의 변기 위에는 도대체 무슨 문구가 붙어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정서 표현 자체가 억압되는데 어찌 정서적 표현을 통해 전달되는 사회적 참조가 가능할까? 남자들에게는 사회적 가치, 도덕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사회화 절차가 기초부터 꼬여 있다는 이야기다. 어찌 성숙할 수 있을까? 철없는 남자들에게 남겨진 방법은 둘 중 하나다. 개처럼 으르렁거리거나, 애처럼 징징대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