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25. 11:07ㆍ라이프/책&작가 평론
20년간 글을 써온 기자 형님에게 물었다. "형님 비범한 시인 추천 좀..." -> "허연, 심보선. 허연 좋아". 허연 시인의 시집을 찾아보니 '불온한 검은 피'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네이버 책 평점은 무려 만점(10점)이다. 30명이나 별점을 매겼는데 만점이라니, 놀라웠다. 교보문고에서 바로드림으로 책을 주문하고 하루에 1부씩 읽었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고 분량도 적당해서 하루에 1부씩 읽기에 딱 좋았다.
이 책은 십수년 전에 나왔는데 금새 절판됐다고 했다. 김경주 시인을 비롯한 수많은 청춘들이 이 책을 돌려보며 필사했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뛰었다. 게다가 시인 허연은 현재 매일경제 문화부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기대가 컸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보니 생각만큼은 아니었다. 나의 성향이 작가와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나의 독해력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시를 읽을 당시의 내 마음과 허연이 글을 쓸 당시의 마음이 달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던 구절들을 남긴다.
<상계동> 중
마을버스가 들어오면
하루 종일 강요에 지친 다 똑같은 얼굴들이
제각기 골목으로 떠밀려 가고
<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그대는 오지 않았네. 삐뚤어진 세계관을 나누어 가질 그대는 오지 않았네. 나는 빛을 피해서 한없이 걸어가네.
<판화> 중
세월의 입장에선 그걸로 그만이었지만
<저녁, 가슴 한쪽> 중
바람 한가운데
섬처럼 서 있다가
<참회록> 중
11월 보도블록 위를 흘러 다니는 건 쓸쓸한 철야 기도였고, 부풀린 고향이었고, 벅찬 노래였을 뿐.
<별곡 2> 중
이 새벽에 내리는 아찔한 비를 원망합니다. 미친 듯이.
<잠들 수 있음>
꿈 같은 세상이다. 엿 같은 꿈.
<벽제행>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음을 어루만질 수가 없다
<불간섭> 중
단풍을 강요하지 말게나 혹은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늘을 주장하지 말게나.
<청량리 황혼> 중
애써 보이려 하지 않아도 우리들의 가난과
짝사랑은 속살을 비집고 나와
찬 바닥에 나뒹굴곤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