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의 돼지저금통과 박민규의 소설

2011.09.01 11:50마케터로 산다는 것/일상

박민규


지금의 직장 이전의 회사에 다닐 때 일이다. 출근한지 한달쯤 됐으려나. 사무실에, 그 것도 바로 내 앞에 예쁘게 생긴 여직원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오, 예쁘다. 싶을만큼. 그녀의 이기적인 외모 때문인지 다른 여직원들로부터 약간의 따돌림을 받고 있는 눈치였다. 남자직원이라곤 임원분들 외엔 나 하나뿐이었으므로 그런, 엽기적인 일들이 충분히 일어날만 했다. 여직원들로부터 보고 들은 것만 책으로 엮어도 세 권은 족히 나올 정도니까.



하루는 도와줘서 고맙다며 술을 마시자는 그녀. 미녀가 막걸리를 쏜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2009년 히트상품 1위인 그, 막걸리'님' 을 뵙기 위해 그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영양가라곤 어릴적 학교 앞에서 팔던 테이프과자 만큼도 없는 무미건조한 이야기를 나눈다. 막걸리님과 안주 녀석들을 모조리 위속으로 영접한 후 주점을 나왔다. 갑자기 왼팔을 낚아채며 날 다이소로 데려간다. 저금통을 하나 사려고 하는데 당신 것도 고르란다. 제일 큰 돼지 한마리를 골랐다. 오늘 등장하는 저금통이 바로 그 제일 큰 돼지저금통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아니, 맙시다 라고 해야지.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며 사무실 앞의 국민은행으로 향했다. 대기표를 뽑고 기다린다. 기다리는 사람도 딱히 없구만. 뭘 얼마나 기다리라는거지? 점원에게 가서. 30만원 새 돈으로 찾고 싶은데요. 라며 주객이 전도 된 상황으로 보일만큼 친절하고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더니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아오란다. 다섯 걸음은 될 터인데.. 귀찮지만, 30만원을 찾아와서 그녀에게 건넨다. 30만원을 새 돈으로 바꿔주면 그만인데. 스마트폰 쓰시면 국민은행 어플 이용해 보셨나요? 라며 자기 회사 어플 홍보를 하신다. 뒤에 부장님이 계셔서 그런거지요? 묻고 싶었지만. 아무튼, 때로는 직장생활이라는게. 내가 하는 것보다 남이 하는 걸 지켜보는게 더 재밌다.

사흘 전이었나. 기자 한분으로부터 소설가를 추천받았다. 아아, 추천이 아니라 한사코 추천해달라고 졸랐더니 '어쩔 수 없이' 한명 추천해 주는 눈치였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소설가 박민규. 왠지 동네 형 이름 같은데? 광화문 교보문고의 바로드림 서비스를 이용해서 카스테라 라는 책을 샀다. 시시한 제목과는 달리 이건, 뭐.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 카스테라 보다 소보루가 좋은데. 집 앞 구멍가게에서 800원짜리 카스테라를 사서 먹어봤을 정도니까. 이 책은 카스테라 이야기를 다룬 건 아니다. 내가, 박민규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 방식이 마음에 들어서다. 소설인데, 소설이라는데 만화책을 보는 것처럼 술술 읽힌다. 머리 아프지 않고.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여운도 남는다. 내가 뭘 읽은거지?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 




500원짜리만 모으다가 어느 정도 모였다 싶어 은행에 가져갔더니 7만 얼마란다. 어이없다. 7천만원도 아니고. 돼지저금통의 등심 부분을 담당하던 500원짜리들이 없어서 조금, 많이 허전해보인다. 내가 저금해 놓고 놀라기도 한다. 피웅신 같다고 해도 어쩔수 없다. 어랏, 만원짜리도 저금했었네?



30만원어치나 먹어 치우다니. 돼지저금통이 부럽긴 처음이다. 30만원이면 분위기 좋은 일식집에서 두명이서 거하게 한잔 할수 있는 돈인데. 부럽다, 돼지야. 형도 휴일이면 햇반으로 때우는 날이 많은데. 녹색 채소가 몸에도 좋다는데 많이 먹고 무럭무럭, 아니 뒤룩뒤룩 자라거라.



그녀가 사준 돼지저금통, 그것도 얼짱 각도. 코가 무식할만큼 큰데 오른쪽으로 돌려서 세로 모양이 되면 뽕하는 소리와 함께 뽑을 수 있다. 처음엔 이렇게 허술한 저금통도 있냐며 돼지를 학대했다. 하지만 돈이 얼마나 모였을지 확인하기에 용이하므로 돼지의 저 무식한 코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카스테라를 읽고 소설가 박민규의 글을 짝사랑하게 됐다. 생각해보면 짝사랑, 까지는 아니고 짝좋아함 정도랄까. 더블은 2권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카스테라가 조금 신선한 충격이었다면 더블은 조금 덜 신선한 충격, 아니 소설이다. 상, 하권이나 1, 2권이 아닌 side A, side B로 구성된 책 제목이 마음에 든다. 아이폰 음악 재생목록을 side A, side B 이런 식으로 만들었는데 어쩌면, 만에 하나, 아니 둘쯤. 박민규와 나는 닮은 구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처럼 쓰는 법을 습득하기 위한 공부의 일환으로 밑줄 긋기 신공을 펼치고 있다. 철로 치면 주철의 근성으로 세상을 헤쳐왔단다. 나였더라면. 엄청난 근성으로 세상을 살아왔다. 로 허무하게. 끝냈을 터. 역시 소설가의 내공이란, 끝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