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17. 20:40ㆍ라이프/소탈한 여행기
서울에 다녀왔다. 13년간 서울에서 살았던 터라 대부분의 풍경은 낯이 익었다. 과거에 썸을 탔던 누나를 만났는데 하필이면 내가 즐겨찾던 홍대 근처에서 만났다.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온지 6개월이 넘었는데 홍대에서 저녁이 되자 마을버스를 타고 과거에 살던 성산동으로 마을버스를 탈 뻔했다. 홍대와 합정은 몹시 익숙한 장소였다.
회사 동료에게 주말에 서울에 간다고 얘기했더니 비행기를 타보라고 했다. 광주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 1시간이면 서울에 갈 수 있고 KTX보다 운임도 저렴하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 KTX는 물론이고 ITX새마을 기차요금보다 더 쌌다. 네이버 검색으로 진에어편 왕복 항공권을 예매했고 그렇게 서울여행의 막이 올랐다.
처음 방문한 광주공항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붐볐다. 서울행 비행기도 만석이었다. 와- 비행기로 서울 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지인과 앤트러사이트 서교라는 카페에서 보기로 했는데 자리가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답답했던 인파가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분위기였다. 하는 수 없이 바로 옆에 있는 북카페에 갔는데 분위기가 참 좋았다. 출판사 창비가 운영하는 카페라고 했다.
나는 아포가토를 먹었고 누나는 커피를 마셨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도 묻고 직장 이야기, 재테크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두어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서울에서 사려던 책(피터린치의 투자 이야기)이 있어서 누나랑 교보문고 합정점에 걸어갔다. 서울은 날씨가 마치 겨울처럼 추웠다. 본인보다 춥게 입은 나를 걱정해주는 누나가 참 고마웠다. 이런 사소한 배려에도 감동을 받다니.. 나도 늙었나보다. 책을 찾다보니 금방 배고파졌고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서점을 나섰다.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된 합정 라멘집과 우동집에 갔는데 연달아 대기가 많아 실패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면요리를 내는 식당이 인기였다. 세번째로 찾은 식당 겐로쿠우동은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맛이 좋았다. 불판에 볶아서 그런지 우동에서 불맛이 났고 레몬이 들어간 단무지는 상큼했다.
저녁을 먹고 누나와 헤어졌다. 남녀간의 사랑은 없었지만 왠지 모를 우정같은 게 싹트는 느낌이었다. 누나인데 가끔 형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ㅋㅋㅋ 누나를 지하철역까지 바래다 주고 숙소를 폭풍검색했다. 신촌에 있는 어느 모텔을 찾았고 캔맥주에 넷플릭스를 보며 잠드는 상상을 하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추운 바람이 불어오니 더없이 따뜻한 곳으로 숨고 싶었다.
급하게 예매하고 들른 모텔은 실망스러웠다. 여기어때에 올라온 사진은 포토샵 전문가의 보정을 거쳐서 그런지 여기어때의 방사진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래도 따뜻하니까 좋더라. 다시 내려가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안주거리를 사서 들어왔고 넷플릭스로 백스피릿을 봤다. 백종원 아저씨가 나오는 술에 관한 토크쇼였는데 정말이지 노잼이었다.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는 정말 재밌었는데 이건 뭐... 재미도 감동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할까. 에라, 잠이나 자자!
많이 걸어서 그랬는지 잠을 푹 잘잤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식사를 하고 리움미술관에 가려고 했는데 예약을 하지 않으면 못간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접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예매하려고 보니 오늘 모든 시간대가 매진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도 이건희 컬렉션 때문인지 매진이었다. 아놔~ 교보문고에 가서 못본 책이나 보자며 다시 합정으로 갔다. 합정 교보문고에 갈 때마다 보던 샤브보트에 가서 샤브샤브를 먹었는데 넘나 맛있었다. 혼밥을 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고 소스맛도 넘 좋았다. 특히 칠리소스가 맛있어서 3번은 짜먹었다. 소고기는 솔직히 돈이 아까운 수준이었다. 차라리 저 소고기 넣을 바에는 대패 삼겹살을 넣는 게 더 맛있을 듯?
교보문고에 들러 사려고 했던 책(피터 린치의 투자 이야기)은 안 사고 소설가 황정은의 에세이집 일기를 샀다. 다른 작가가 쓴 불온하고 불완전한 편지라는 이름의 시집과 고민하다 일기를 샀는데 정말 좋았다.
오늘 오후 김포공항의 모습이다. 제주도와 광주 부산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다. 셀프수속을 하면서 맨 뒷자리 가운데로 좌석을 지정했는데 하필이면 뚱뚱한 남자 두 명이 양 옆에 앉았다. 하이나! 그래도 꾿꾿이 어깨 방어를 하며 황정은 산문집 일기를 읽었는데 공감가는 문장들이 많아 참 좋았다. 특히 부모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이 어쩜 내가 생각했던 것과 그렇게 쏙 닮았는지 작가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들른 서울은 많이 낯익었고 조금 낯설었으며 차가웠다. 극도로 예민한 내 감각으로 서울은 사람은 많지만 개인주의가 심해 온도가 차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서울은, 볼거리도 많고 쓸데없는 간섭이 적었으며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도 훼손할 수 없는 독특함과 느슨한 연대감을 지닌 도시였다. 서울아, 다음에 또 만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