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한국은 초등학생도 아이패드로 책을 읽고 시험공부를 하고 유튜브 동영상을 보는 디지털 사회다. 정작 국가 전략의 핵심인 공공기관들의 시계는 여전히 잉크 냄새가 진동하는 아날로그 시대에 멈춰 있다. 매년 수만 권씩 쏟아져 나오는 종이 보고서와 정기 간행물,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수십억 원의 인쇄 예산은 공공 부문 비효율이 얼마나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서글픈 자화상이다.
인쇄업체등록제 악용하는 그들만의 독점리그
공공기관 인쇄물 발간은 그들만의 폐쇄적인 시스템 안에서 움직인다. 공공기관은 조달청 나라장터를 통해 인쇄업체 등록 신청 공고를 올리고 선발된 10개 내외의 업체와 1~2년 단위로 장기 계약을 맺는다.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 해당 기간 기관에서 발생하는 모든 보고서, 브로셔, 리플릿 등 인쇄 물량은 이들에게 고스란히 배정된다.
이런 행태는 국무조정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경인사) 소속 국책연구기관들(https://www.nrc.re.kr/menu.es?mid=a12006000000)에서 두드러진다. 정책의 미래를 설계한다는 기관이 정작 행정의 고질적인 관행인 인쇄업체 등록제에 기대 막대한 물량을 특정 업체들에 몰아주고 있다.
우선구매 실적 핑계로 맺어진 은밀한 공생 관계
이토록 종이 보고서 인쇄에 집착하는 이면에는 우선구매 실적이라는 계산이 숨어 있다. 현재 공공기관은 관련 법령에 따라 여성기업 제품 5%, 장애인기업 제품 1%, 중증장애인 생산품 1%, 사회적기업 제품 3% 등 정부(국가기관)가 권고하는 우선구매 비율을 준수해야 한다. 이는 경영평가의 핵심 지표이기도 하다.
이 지점을 파고든 인쇄업체들은 인증을 받으려 혈안이 되어 있고 인증만 받으면 실적 점수가 필요한 공공기관에 당당히 명함을 내민다. 실제로 우선구매 인증을 가진 인쇄업체 직원을 만나 명함을 받으면 명함에 각종 인증들이 적혀 있다. 문제는 지연과 혈연으로 얽힌 공공기관 직원들과 업체 관계자들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거래를 이어가는 구태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무자와의 인맥을 타고 들어간 인증 업체들은 실적 채우기에 급급한 기관의 생리를 이용해 수년째 일감을 독식한다. 겉으로는 사회적 가치 실현을 내걸지만 안으로는 사적인 인연이 세금을 나눠 먹는 은밀한 통로가 된 셈이다.

2025년에도 멈추지 않는 혈세 낭비 인쇄비
이러한 유착 구조는 세종시 인근에 인쇄업체들이 대거 몰려드는 기묘한 생태계를 만들었다. 경인사 소속 26개 기관이 연구보고서 인쇄비로 지출하는 금액은 연평균 40억 원을 상회한다. 구체적인 사례로 울산 소재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세계에너지시장 인사이트(https://www.keei.re.kr/board.es?mid=a10103010000&bid=0003)라는 정기 간행물(격주간)을 발간하며 한 인쇄업체에 격주로 100권이 넘는 인쇄를 맡기면서 권당 단가 약 3만 원(인쇄비만 해당)에 육박하는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분량도 65P로 적은데 양장본(하드커버) 단행본 보다 비싼 비용으로 인쇄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이미 홈페이지에 PDF 파일로 공개되어 있으며 이 값비싼 종이책을 펼쳐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국 주인을 찾지 못하고 발송용 박스조차 뜯기지 않은 각종 보고서들은 공공기관 우편함 또는 창고 한구석에 쌓여 공간만 차지하는 짐으로 전락한다.
관행적인 인쇄물 발간 멈추고 PDF로 전환해야
결국 우리가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는 종이 보고서의 용퇴다. 이제는 유효기한이 지난 종이 발간 관행 자체를 폐지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공공기관은 인쇄업체등록 신청제를 폐지하고 발간물은 웹용 PDF로 만들어 홈페이지에 게시하면 될 일이다. 10만원~20만원이면 만들 수 있는 PDF를 굳이 수백만원~수천만원을 들여 종이책으로 만드는 행정을 멈춰야 한다.
종이 보고서는 법적 보존용 등 최소한의 수량만 남기고 모든 대외 배포는 디지털 파일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 인쇄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소량 제작하는 수요 맞춤형 인쇄를 전면 도입해야 한다. 행사 포스터, 리플렛 등만 남기고 연구보고서, 정기간행물 인쇄를 제외하면 인쇄 물량이 대폭 줄어 혈세 낭비를 막을 수 있다.
우선구매 실적을 인쇄물로 땜질하고 사적 인연으로 일감을 몰아주는 편법을 차단해야 한다. 단순 소모품 구매가 아닌 실질적인 기술 협력과 서비스 구매로 평가지표를 개선하여 불필요한 인쇄 수요를 원천 차단해야 한다.
*TIP: 국무조정실, 국회의원실(정무위원회), 감사원, 검경 등 조사 담당자분께 팁을 드린다. 각 공공기관의 인쇄물 거래 내역은 알리오 기관별공시(https://www.alio.go.kr/organ/organDisclosureList.do) 메뉴를 통해 기관별/년도별 인쇄물 거래 내역을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공공기관 예산은 주인 없는 돈, 눈먼 돈이 아니라 국민의 피땀으로 모은 소중한 혈세다. 디지털 전환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공공기관은 종이인쇄라는 비효율과 부정의 거미줄을 걷어내고 국민에게 와닿는 스마트한 행정으로 나아가며 그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