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3. 08:25ㆍ라이프/이것저것 리뷰
한국이 공작/첩보를 목적으로 북한에 보내는 스파이를 보통 북파간첩이라고 한다. 1983년 12월 3일 부산 다대포 무장간청 침투 생포작전에서 부산에 침투한 무장간첩을 생포한 것은 육군이 아니라 북파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이 공작원에 의해 드러났다.
당시 정부는 육군이 무장간첩을 생포한 것으로 발표했으나 이는 왜곡된 사실이었다.
아래는 북파공작원 출신 조철행씨가 작성한 글이다.
설악 동지회
지난 1983년 12월 3일 부산 다대포로 침투한 무장간첩을 생포한 것은 북파공작원들이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당시 보도된 육군 초병이 격투끝에 잡았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며,그동안 숨겨져 오고 왜곡된 것을 바로 잡고 재평가 받기 위해 20년이란 세월을 뒤로하고,지금에 와서야 잘못된 첩보행정으로 인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적으로 임무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발단(북파공작원) 대원들의 억울했던 과거와 암울했던 시절을 밝히고자 한다.
나 조철행은 1982년 2월 개발단에 입사하여 제3공작대 15팀에 척후였으며 목표는 곡산 비행장 관제탑 및 활주로 폭파였다. 목표를 위해 사회로부터 철저히 밀봉된 채 참혹하고 혹독한 훈련중 부산 다대포 무장간첩 침투 생포작전에 선발됐다.
1983년 11월 13일 오전 9시 30분 개발단 아침.악명높던 고참 반장들이 팀별로 동시에 전달이라는 구호 소리가 들려 왔다. 참고로 개발단에는 당시 제1공작대, 제2공작대, ,제3공작대, 제4대(견습대)가 존재했었다.
각대 대원들중 선발을 하였고 한창 힘이 올라있던 나는 그렇게 선발되여 선발된 대원들과 함께 제1공작대에서 합숙훈련을 하게 되었다.무슨 임무인지 모든 것이 보안이였고,비누와 치약 등 냄새가 나는 것은 일체 사용을 하지못하게 하였으며 작전에 투입되기 전까지 부상자가 속출되지 않도록 지시을 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선발된 우리는 대원들과 격리수용을 되여 합숙훈련을 시작했다.
팀장3명은 대략 임무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떠한 훈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처음 2-3일은 방향이 설정이 되지 않았다. 그 후 임무수행 지역과 유사한 지역을 답습한 후부터 현지와 유사한 지형 지물을 설치한 후 야간에만 특수 훈련을 반복하였다.
훈련은 적을 가장한 대원을 (대항군) 특정지역을 통과하면 순식간에 제압하는 생포훈련 이였으며 최대한 적을 사정거리 까지 유인하여(반경 2-3m) 생포하는 것이였기에 훈련을 하면서도 엄청난 의문이 많았지만, 대원들은 알 수가 없었다.
무조건 생포을 해야 한다는 임무에 대원들에게 주어지는 무기는 박달나무 몽둥이와(직접 깍아 만듬) 대검, 수갑, 입자갈 등이 전부였으며 부상자가 없도록 모두 긴장의 연속 이였다.
17일간 훈련을 마치고 거의 임무수행 날짜가 가까워진 예감이 들었으며 대원들은 한 명식 대장과 팀장의 면담 후 보안서류에 죽어도 좋다는 손도장을 찍었다.
그후 1983년 12월 2일 금요일 임무수행을 위해 작전에 참가한 대원 전원이 근처 안가에 대기해 놓은 버스로 이동해 탑승한 후 이동을 했다. 얼마나 크고 중요한 일이기에 개발단 대원들이 강원도에서 부산까지 간단 말인가 생각했고 8시간 가량을 이동 했을까 부산 근처에 오게 된 것을 알수 있었다 부산의 번화가 남포동을 지나면서 00 근처의 00공사에 도착을했다.(당시는 그곳이 무엇 하는 곳인지 전혀 몰랐다)대원들은 00공사 내무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 정부기관 관계자로부터 임무수행 내용을 정확히 전달받았다. 5-6명이 탑승한 간첩선이 다대포 해안으로 접근해서 그중 2-3명이 다대포 해안으로 침투 "기간 산업파괴 및 고정간첩을 대동하고 귀환"하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는 것이였다 그런 목적으로 침투하는 무장 간첩을 반드시 생포하라는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졌던 것이었다.
심지어 대원들의 부상이 있거나 그이상의 일이 벌어진다 해도 침투 하는 무장간첩들을 반듯히 생포하라는 지시였고 생포을 위해서는 총기류을 지니고 있다가 급하면 사살 할수도 있으니 생포을 위해 박달나무 몽둥이와 대검, 수갑, 입자갈 등만 가지고 임무지역에 투입 된다고 말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당시 대내외적으로 생포 해야하는 이유도 있었다.
1983년 10월 9일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 랭군에서 북한의 공작원들에 의해서 폭탄테러(크레모아)에 의한 우리 정부측 인사들이 수없이 죽었으며,이번 기회에 반듯이 생포를 하여서 북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우리는 1983년 12월 3일 토요일 점심 시간이 지날 무렵 다시 전달 사항이 왔는데, 간첩선이 울릉도 근해를 지나고 있다고 통지를 받았다. 오후 5시경 저녁식사를 마치고 모든 준비를 완료한 후 다대포로 이동 7시경 각자의 위치에 은폐 엄폐를 하고 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칠흑같은 어둠속에 12월 차가운 바다 바람이 뼈속까지 파고들며 초긴장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적(북한 무장 간첩선)이 나타난 것을 확인하고 신호줄을 이용하여 대원들간 연락을 취하고 숨을 죽이고 있는 순간 전충남(조장) 이상규(조원)가 순식간에 접촉 장소로 이동하기 위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장간첩 전충남과 이상규가 사정거리에 들어왔을때 제1공작대 팀장(김과장 우리는 이름을 알수 없음 당시 그냥 팀장이라는 호칭만 사용했다) 엽총 공포탄 소리에 생포조 들은 무장한체 침투 해오는 전충남과 이상규가 당시 화장실안으로 벨기에제 무성권총을 들고 인척을 확인하려는 순간 대기조가 몽둥이로 전충남 의 총을 든 손을 내려쳐 제압 하자 전충남이 목에 걸고 있던 체코 기관권총 8발을 발사 했으나 대원들의 머리옆으로 스쳐 지나가고 제압 당하던 전충남이 이상규에게 '상규야 수류탄까.."라고 소리 치자 인근 대기조(제1공작대 선발조)가 온몸을 던져 이상규도 제압되었다.
모든 상황이 불과 몇초안에 이루어 졌으며 대원들은 극단적 선택을 하려는 전충남 이상규에게 입자갈을 물리고 배낭과 무기를 해체했다.
그런 상황에 총소리가 나자 2-3Km 해상에 대기하고 있던 적의 모선에서 박격포가 발사되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원들은 전충남과 이상규를 완전 제압하고 임무수행 완수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작전 지휘 본부는 현장에 보이질 않았다. 기관권총 소리가 여러발 나서 그런 것 같았음. 순간 공군에서는 조명탄을 띄우고 날아갔으며 해군은 군함으로 모선(공작선)을 추격했으나, 잡지도 못하고 들이박아 침몰시키는데 그치고 말았다.
임무을 완벽하게 수행한 우리들은 전충남과 이상규를 헬기에 실어 보내고 생포현장을 빠져 나오는데 우리들 2선에서는 공수부대 대원들이 실탄장진하고 있던 총을 약실검사을 하고 있었으며, 3선에는 일반 부대원들이 있었는데 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부산 00공사에서 12월 4일 06시 30분경 개발단으로 귀환도중 38선 휴게소에서 점심식사를 한후 대원들 모두가 버스에 탑승한 상태에서 당시 단장 정00 단장이 말을 하였다.
부산 여론이 이상하다 무장 간첩을 생포한 사람이 하사1명과 방위병이 잡았다고 발표한 것을 믿지 못하는 등 여론이 이상하다 그래서 우리 대원중에 1-2명이 부산 다대포 지역 육군으로 위장을해 상을 받아야 하겠는데 고참(선임) 대원이 받으면 되겠냐고 묻기에 대부부 좋다고 했으며 정단장이 덧 붙여서 우리는 신분을 노출 시킬수가 없으니 대원 1-2명이 여러분들을 대신하여 상을 받는 것이고 임무수행에 참가한 대원들에게 똑같은 훈장과 포상금을 지급할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구두상으로 언급했으며 대원들은 장군님 할아버지등을 외치며 좋아했다고 했다.
우리 개발단 대원들은 임무수행을 완수하고 아무일 없듯이 그렇게 산속 개발단으로 향했다.
그후 당시 생포조 및 임무에 투입된 개발단(북파공작원) 대원은 목숨을 걸고 임무을 수행했다. 그러나 공로는 불평등 했다. 비행기 타고 고향으로 금히 환향은 못할망정. 그후 계속된 강 훈련과 사회 배출까지 사회와 철저히 차단된 채 밀봉교육을 받았으며 누구는 훈장에 5천만원을 주고 실제 생포한 대원들은 훈장과 일천만원 그리고 터무니 없는 것은 생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금 150만원,500만원 등으로 얼버 무리고 말았다.
임무을 완벽하게 목숨걸고 수행하고도 이런 불평등한 처사가 어찌 있을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공군은 조명탄만 띄워주고 가벼렸으며 해군은 군함으로 그까짓 5t급 모선(공작선)하나 격추 침몰시킨 공로로 고급 훈장과 포상을 하면서 우리 개발단 대원들은 목숨 걸고 작전에 투입 되였거늘 너무도 형평성에 맞지않은 대우을 하였다.
당시 해군과 공군에 비해 개발단(북파공작원)임무수행에 참가한 대원들에게는 이제라도 그에 합당한 대우가 있어야 하며 이제라도 다대포 무장간첩 침투 생포작전에 대한 재평가 실시가 이루어져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