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14. 17:41ㆍ라이프/잡문집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지도 '벌써수년'이다. 몇 해 전만 해도 두명이 누우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조그마한 방에서 지내면서 유일한 낙이라곤 블로그로 알게 된 사람을 만나 술자리를 갖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여행과의 인연은 그다지 길지 않다. 나 스스로 오타쿠 기질이 강한 나머지 방안에 콕 박혀 책을 읽거나 블로그를 하거나 게임을 하는 게 취미 생활의 전부였다. 지인을 만나러 밖에 나가 횡설수설을, 간혹 우설을 안주삼아 소주잔을 부딪히거나 연인을 만나러 나가는 게 외출의 이유이자 핑계거리였다.
팸투어(기업이나 지자체가 홍보활동의 일환으로 기자나 블로거를 초청하여 관광, 숙식, 행사참여 기회 등을 무료로 제공하는 일) 초청을 받아 방방곡곡 여행하는 일도 종종 있었는데, 여행 후에 따르는 포스팅에 대한 의무감이 부담으로 느껴지기도 해서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게다가 팸투어를 운영하는 블로거들끼리도 마찰이 있었는데, 그들의 추한 모습을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일도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나와는 아무런 이해(利害)관계에 있지 않은 그들이었지만 팸투어 운영으로 생기는 적은 돈에 눈이 멀어 회사의 영업비밀을 가지고 퇴사한 어느 블로거의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광(狂)경이었다.
회사생활을 시작한 후로 조금씩 여행에 대한, 일종의 열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나아가 나 자신의 무능함과 '세상살이 참 내맘대로 되는 게 없네' 하는 무력감에 치이다 보니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고 보는 게 옳지 싶다. 게임이나 독서가, 그녀와의 연애가 채워주지 못하는 무언가를 찾아 떠났다. 누구처럼 쿨하게, 훌훌털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싶었으나 나 자신이 그렇게 쿨한 사람은 아니기에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떠났던 것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목적 없는 여행은 없다. 일상에 지쳐 위로를 받고 싶든, 남들 다 가는 해외 여행이니까 나도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든, 돈이 생겼는데 막상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마음에 여행을 택하든, 해외여행에 다녀온 이웃의 블로그 후기를 보고 시샘이 나서 홍콩행 비행기에 오르든, 모든 여행에는 나름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 부끄럽게도, ‘불안’ 때문이다. 지금 여행을 하지 않으면 40세에 암에 걸려 41세에 죽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함. 지금 여행을 해야 남들이 보기에 멋져보이는 청춘일텐데 하는 된장형 불안함 등 온갖 불안들이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라고 등을 떠민다. 하지만 늘 그런 생각으로만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니오니 부디 저를 여행강박증 환자로 보지는 말아주시길 ‘이 문장을 빌어’ 당부드린다.
따지고보면 여행을 하는 동안 슬픔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행을 결심하기 전에 그이에게 차였다거나 해외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비보를 듣고 망연자실 할 수도 있으나 내가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특별히 슬픈 일이 일어날 확률은 지극히 적었다.
소소한 즐거움이야말로 여행의 진정한 기쁨이 아닐까. 좀 더 저렴한 비행기표를 알아보려고 땡처리 닷컴에 들르거나 쿠팡 같은 소셜커머스 사이트에 들러, 아니, 죽치고 앉아 비행기표를 알아보는 것, 싼 값에 비행기표를 구하면 기쁨이 두배지만 결국 허탕을 치는 것조차 그저 즐겁다. 포에버홍콩이라든지 유랑 같은 포털 카페에 접속해 여행지의 맛집과 볼거리를 미리 가보거나 여행일정에 관한 도움을 받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여행 당일 비행기편을 기다리며 공항 라운지를 이용하거나 환전을 하는 번거로움도 여행자에게는 즐거움이다. 온몸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릴 것 같은 뜨거운 땡볕더위도, 홍어 삭힌 냄새는 애교로 느껴질 정도로 역한 취두부 냄새 마저도 순간은 괴로울지언정 여행 후에는 모두 즐거운 추억이요, 기쁨이 되는 것이었다.
텍스트로, 사진으로 아무리 좋은 여행지를 보고 읽는다 한들 직접 여행지로 가 내 눈으로, 내 손으로, 내 발로 경험하는 여행과는 감동의 깊이가 다르다. 스마트폰으로 기타를 연주한다고해서 직접 손가락으로 거친 기타줄을 튕겨낼 때의 기타줄의 떨림과 기타가 전하는 소리와 감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 처럼.
여행은 의사다. 둘도 없는 친구가, 어머니의 위로가, 임재범의 노래 여러분이 차마 보지 못하고, 달래주지 못하는 내면의 상처를 반추하도록 돕고 새살이 돋을 수 있도록 봉합한다. 고로 힘들고 지칠 때는 자전거 페달을 밟든, 춘천가는 기차에 올라타든, 무작정 떠나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