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잡문집

국수의 참맛

Zet 2023. 6. 26.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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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을 여행하며 제일 많이 먹은 음식은 국수다. 맛은 좋고 가격은 싸다. 부담없이 간식으로 먹기도 좋다. 식당 메뉴판에는 주로 누들(Noodle)로 영문 표기되어 있다. 방콕 국수는 한국 국수에 비해 양이 적다. 방콕 고유의 국수맛은 먹어본 사람만 안다. 방콕에는 한국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릉르엉 누들을 비롯 유명 국수 맛집이 몇군데 있다. 사람들이 극찬하는 맛집은 한 두번 가보고 만다. 아무 계획없이 발 닿는 식당에 들어가서 국수를 먹는 재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 운이 좋으면 내 입맛에 꼭 맞는 '나만의 맛집'을 발견할 수도 있다.

태국 여행자들이 즐겨찾는 네이버 카페에서 숙소인 온눗 근처에 국수맛집이 있다는 글을 봤다. 글을 작성한 회원은 간판이 없어서 가게 이름은 모른다고 했다. 숙소에서 5분 거리였다. 온눗 빅씨마트 옆에 있다고 적혀 있었다. 아침을 먹으러 가보기로 했다. 바트(태국 화폐 단위) 동전을 챙겼다. 숙소를 나와 온눗 지상철역으로 걸었다. 빅씨마트는 태국의 이마트로 대형마트 이름이다. 빅씨마트 왼편에 골목길이 있고 골목길 건너 포장마차가 보였다. 아뿔싸! 오전에는 문을 열지 않는구나. 지나가는 행인과 텅빈 테이블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오후에 다시 와야지 하며 지상철역으로 분주히 움직였다.

프롬퐁역에 있는 백화점에 가서 윈도우쇼핑을 했다. 다리가 아파올 무렵 카페에 들렀다. 오전에 먹지 못한 국수를 기필코 먹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다시 온눗역에서 내려 빅씨마트로 걸었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퇴근하고 시장에 들러 저녁거리를 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빅씨마트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연 국수집이 보였다. 테이블에 앉아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했다. 주인 아주머니가 대뜸 와서 물었다. "치킨 누들?". 그래서 "예스, 원 누들 플리즈!"라고 대답했다. 주문하는 데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고추가루, 피시소스, 땅콩가루가 놓여 있었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파리를 손으로 휘휘 저으며 쫓아내는 동안 치킨 누들이 나왔다. 푸짐한 국수 위로 닭가슴살이 올려져 있었다. 국물을 한 입 들이켰는데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났다. 고추가루를 좀 뿌렸더니 얼큰한 닭고기국수가 완성됐다. 면도 너무 가늘지 않고 적당했다. 너무 맛있어서 얼굴을 그릇에 담근 채로 후루룩 먹어치웠다.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다. 반바지 주머니에서 잘그랑거리는 동전을 꺼내 계산했다.

아주머니에게 가게 이름을 물었다. 영어를 못하는지 멋쩍은 미소로 쳐다보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저씨가 와서 통역을 도왔다. 내가 아주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아저씨한테 영어로 얘기하면 아저씨가 아주머니에게 태국어로 통역했다. 구글 지도에 가게 이름을 등록해 다른 사람들이 올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했다. 아저씨가 아주머니에게 통역하자 아주머니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좋아했다. 아주머니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꼬파런 누들. 구글 지도에 한글로 고파런 누들이라고 등록했다. 그리고 태국여행자들이 즐겨찾는 네이버 카페에 식당을 소개하는 글을 올렸다. 맛있게 잘 먹었다며 인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며칠이 지나 네이버 카페에 가보니 내가 올린 글을 보고 국수집에 간 회원의 글이 보였다. 내 닉네임을 소개하며 너무 맛있었다고, 고맙다는 인사글을 남겨둔 걸 읽었다. 어쩜 그리 뿌듯한지.

생면부지의 타인과 주거니 받거니 도움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참맛이 아닐까. 길거리에서 지리를 물었을 때 5분 넘게 동행하며 목적지까지 안내해 준 누군가를 잊지 못한다. 잠깐 짬을 내 구글 지도에 식당을 등록하는 일로 누군가 감동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식당은 국수를 몇 그릇 더 팔게 될 것이며 누군가는 구글 지도를 보고 방문해 국수를 먹고 맛있다며 감탄할 것이다. 방콕에서 먹는 국수에는 이토록 각별한 정취가 담겨 있다.

여행의 참맛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국수를 시켜볼 일이다.

KAOHFAHLUN's Chicken Noodle 꼬파란 누들
https://goo.gl/maps/13VQ4fUyouyR5s4p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