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 영화 버닝을 보고 나서

2018. 5. 24. 02:52라이프/이것저것 리뷰

누군가의 손에 이끌리는 것처럼 영화표를 예매했다. 이창동 감독 영화는 초록물고기, 밀양, 시, 박하사탕, 오아시스 등 거의 모든 영화를 감명깊게 보았기 때문에 버닝은 무조건 극장에서 봐야겠다고 내심 벼르고 있었다. 버닝 역시 이창동 감독 특유의 은유가 영화 곳곳을 넘나들며 관객인 나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우연하게도 혼자서 찾은 극장 양쪽으로 커플 두 쌍이 앉았다. 영화가 끝난 후 그들의 반응 역시 완전히 엇갈렸다. 왼쪽 커플은 쥐죽은 듯하지만 만족한 표정이었고, 오른쪽 커플은 육두문자를 써가며 시간을 버렸다고 했다.


영화의 결말이 다가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창동 감독을 의심했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내 머리속은 온통 버닝으로 가득차버렸다. 벤이 정말로 해미를 살해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종수의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이었던 걸까?


■ 벤은 해미를 죽인 연쇄살인범일까?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벤은 종수에게 대마초를 태우며 "2달에 한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이야기한다. 벤의 집에 놀러간 종수는 벤의 집 화장실 서랍에서 여자들이 차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액세서리를 발견한다. 나중엔 해미에게 준 시계까지 서랍에서 발견한다. 벤을 의심하며 몰래 미행하던 종수는 벤이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저수지는 시체를 유기하기 좋은 장소로 '그것이 알고싶다'에도 종종 등장한다. 사회적인 약자들만 골라서 죽이는 특성도 보인다. 해미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외로운 친구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해미가 사라진 이후 만나는 그녀도 백화점에서 일하는 여종업원으로 생긴 것과 달리 가난한 집 출신(약자)이었다. 벤이 그녀에게 화장을 해줄 때 표정도 연인끼리의 다정함보다는 죽음을 앞둔 공포에 가깝다.


■ 종수가 벤을 살해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종수가 해미의 집에서 소설을 쓰는 장면이 나온다. 벤이 종수에게 칼에 찔려 살해당하는 장면은 사실 종수의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종수는 나름의 망상에 사로잡힌 채로 벤을 살해하는 내용을 떠올리며 소설을 썼을 수 있다.


■ 윌리엄 포크너, 무라카미 하루키, 이창동의 바톤 터치

영화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한다. 또, 극중에서 종수는 윌리엄 포크너 소설을 좋아한다고 벤의 질문에 답한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헛간방화>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의 모티브가 된 소설이다. <헛간방화>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대신해서 죄의식을 느끼는 아들의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 종수는 윌리엄 포크너를 좋아하는 이유로 "내 이야기 같아서"라고 대답한다. 소를 키우는 헛간도 등장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모티브로 소설을 썼고 그 소설을 모티브로 이창동의 영화 <버닝>이 탄생했다는 얘기다.


※ 윌리엄 포크너는 부도덕한 미국 상류층을 고발하는 내용, 미국 남북전쟁 이후의 허무와 전쟁 이후 개인들의 고통을 소설로 담아낸 작가로 노벨평화상과 퓰리처상을 받았다.


■ 영화 곳곳에 숨은 메타포(은유)

극중에서 해미가 벤에게 매타포가 뭐냐고 묻자 벤은 종수가 그 답을 알려줄 거라고 이야기한다. 종수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축산업을 하다 말아먹고 한번은 공무원을 폭행했지만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 않아 1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받는다. 종수 아버지의 군시절 사진이 아버지댁에 걸려 있고, 종수가 먼산을 보며 저기가 북한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 분단으로 인해 고통받는 아버지 그리고 그 아들 종수가 대신 괴로워하는 상황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속 이야기와 일치한다.


■ 명감독의 히스토리가 만들어낸 미스테리

오늘 내 양 옆으로 앉은 커플들처럼 호불호가 완전하게 갈리는 영화다. "영화는 꼭 스트레스를 풀어줘야 해", "영화는 꼭 쉴틈이 없어야 해"처럼 생각하는 "영화는 꼭 이래야 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천하기 싫은 영화이기도 하다. 국어교사, 소설가를 지낸 이창동 감독의 커리어가 모처럼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어냈다. 버닝 재밌어? 라고 물으면 잠시 머뭇거릴 것 같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내가 가장 많이(반복해서) 본 영화가 될 것 만큼은 분명하다.